“따끔함이 따스함으로 익어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추석에 형님들이 오시면 반갑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중학생 때였다. 큰 형님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작은 형님은 짧고 단호한 말로 따끔하게 말했다. “지난 학기 성적은 어땠니? 그래 가지고 법대 가겠니?” 따끔한 말로 꼭 짚고 넘어갔다.
이번 추석에도 일산에 사시는 큰 형님댁에서 삼 형제 내외가 모였다.
형님들의 예전의 그 따끔함은 어디 가고 온통 따스함으로 가득했다. 큰 형님은 칠십이 넘었고, 작은 형님은 육십 대 중반이다.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흘린 인생의 눈물들이 스며들어 따끔함이 따스함으로 바뀐 것 같다. 눈을 부릅뜨고 알려주는 말을 했던 형님들이 알아주는 말씀들을 하신다. 앞에 앉혀놓고 말을 했던 형님들이 뒤에서 기도하는 장로님들이 되셨다. ’이번에는 내가 꼭 짚고 넘어가리라‘ 했던 형님들이 ’이번에는 품고 넘어가지‘ 그러신다. 따끔함이 따스함으로 익어가는 것, 이것이 인생인가 보다.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말한다. “소년은 허약하고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결실과도 같은 것이라네” 따끔함의 위엄과 예리함이 따스함으로 익어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요 인생의 원숙함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말했다. ‘노년기의 젊음이란 청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세대에 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고.
어느덧 나도 육십 대 초반을 살고 있다. 예리함, 따끔함이 여전히 많은 것 같다. 알려주는 말, 짚고 넘어가는 말, 면전에서 말로 다 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요, 내가 살아있음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내 나이에 맞는 청춘을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연습을 해야겠다. 알아주는 말, 뒤에서 하는 기도, 품고 넘어가는 자세를 매번 새롭게 창조하는 훈련을 해야겠다. 따끔함의 예리함이 따스함으로 익어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인생 수업’ 다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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